같은 목적지를 향한 두 장의 설계도
디지털 원화 · 2026년 7월 기준 정리
한국의 디지털 원화 논의가 묘한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민간이 발행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법적 근거조차 없는데, 중앙은행이 주도하는 예금토큰은 오는 9월 실제 거래에 들어갈 준비를 마쳐가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공공이 민간을 앞질러버린 이상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건 속도 경쟁이 아니라 설계 철학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에 가깝습니다. 두 트랙이 각각 어디까지 왔는지, 무엇이 걸려 있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스테이블코인 — 원화나 달러 같은 법정화폐 가치에 연동되도록 설계된 가상자산입니다. 가격 변동이 작아 결제와 송금에 쓸 수 있습니다. 다만 대규모 환매가 한꺼번에 몰리면 준비자산을 급히 팔아야 하고, 그 과정에서 유동성 경색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이 위험 요인으로 지적됩니다.
예금토큰 — 은행 예금을 분산원장 위에 디지털 자산 형태로 토큰화한 것입니다. 물품·서비스 구매에 쓸 수 있습니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은행 예금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기관용(도매) CBDC —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 중 일반 국민이 아니라 금융기관 간 결제에 쓰이는 것입니다. 예금토큰의 담보이자 정산 수단 역할을 합니다.
화폐의 단일성(singleness of money) — 어디서 받은 1만 원이든 언제나 똑같은 1만 원이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니 기억해두세요.
한은 예금토큰
이미 굴러가고 있는 실험 — 프로젝트 한강
한국은행의 CBDC 기반 실증사업 이름이 프로젝트 한강입니다. 구조는 2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국은행이 블록체인 기반 기관용 CBDC를 발행하고, 시중은행이 이를 담보로 예금토큰을 발행해 일반 국민이 실제 지급결제에 쓰는 과정을 검증합니다.
한국은행이 은행들에게 디지털 금괴를 맡깁니다. 은행은 그 금괴만큼만 디지털 상품권을 찍어 손님에게 내줍니다. 상품권은 은행마다 이름이 다르지만 뒤에 놓인 금괴는 하나이므로 어디서 받든 값어치가 같습니다. 이것이 화폐의 단일성을 지키는 방식입니다.
1단계에서 확인된 것과 확인되지 않은 것
2025년 4월부터 6월까지 진행된 1단계 실거래 테스트에는 전자지갑 기준 8만 1천 명이 참여해 11만 4,880건을 거래했습니다.
숫자만 보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나눠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1인당 1.4회입니다. 대부분의 참여자가 한두 번 써보고 말았다는 뜻이지요. 원인으로는 쓸 수 있는 가맹점이 부족했다는 점과 편의성이 미흡했다는 점이 꼽혔습니다.
기술이 되는지는 확인됐지만, 사람들이 쓰고 싶어 하는지는 확인되지 않은 셈입니다. 2단계가 상용화 검증에 방점을 찍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단계 — 9월, 9개 은행
참여 은행이 늘었습니다. 기존 7곳(KB국민 · 신한 · 하나 · 우리 · NH농협 · IBK기업 · 부산)에 경남은행과 iM뱅크가 합류해 9곳이 됐습니다.
달라지는 점들입니다.
- 가입 절차 간소화, 개인 간 송금(P2P) 도입, 생체인증 추가, 가맹점 확대
- 예금토큰으로 국고보조금을 집행하는 실증 — 국고금과 업무추진비까지 확대 검토
- 1단계가 기간을 정해둔 테스트였다면, 2단계는 무기한 실거래로 설계
시스템 개발과 참가자 모집이 예정대로 끝나면 9월경 실거래가 시작될 전망입니다.
내년에는 국채까지
재정경제부는 7월 14일 발표한 2026년 하반기 경제성장전략에서, 내년에 한은 기관용 CBDC와 연계한 국채 토큰화 실증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디지털화폐 블록체인 안에서 국채가 유통되고 기관용 CBDC로 결제가 이뤄지는 모델입니다.
지급결제에서 자본시장으로 무대가 넓어지는 그림입니다. 앞서 정리한 실물자산 토큰화(RWA) 흐름과 정확히 맞물리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입법
아직 출발선에 서 있는 법 — 디지털자산기본법
현재 국내에서 민간이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는 것은 사실상 막혀 있습니다. 화폐 발행 권한이 한국은행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벽을 넘으려면 법이 필요하고, 그 법이 가칭 디지털자산기본법입니다. 이 법은 2단계 입법으로 불립니다. 이용자 보호에 초점을 맞췄던 1단계 입법을 넘어, 산업 육성과 규제 체계를 함께 다루는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늦어졌나
정부는 당초 올해 1분기 입법을 목표로 했습니다. 지방선거와 국회 원 구성, 관계기관 간 이견이 겹치며 일정이 밀렸고, 상반기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7월 14일 경제성장전략 발표를 계기로 하반기 재추진이 공식화된 상태입니다.
국회 쪽 기류도 달라졌습니다. 유동수 국회 정무위원장은 7월 초 정부 내 의견이 어느 정도 모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정부안을 빨리 가져오라고 주문했다고 밝혔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발의된 디지털자산 관련 법안들의 통합 작업을 마치고 하반기 중점 법안으로 처리한다는 방침입니다.
쟁점 네 가지
① 누가 발행할 것인가 — 최대 쟁점
은행이 과반 지분을 보유한 컨소시엄으로 제한할지, 핀테크와 빅테크, 가상자산 사업자에게도 문을 열지가 갈립니다. 금융안정을 위해 은행 중심 구조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핀테크·플랫폼 기업의 참여를 넓혀야 혁신성이 확보된다는 주장이 맞서 있습니다. 이 조항 하나가 향후 시장 구조를 사실상 결정합니다.
② 준비자산을 어떻게 규율할 것인가
발행액만큼 현금이나 국채 같은 안전자산을 보유하게 할지, 그 준비자산을 어디에 보관하고 누가 외부 감사를 맡을지가 정해져야 합니다. 스테이블코인이 무너지는 대부분의 사고는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③ 이용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발행 인가제, 이용자의 상환청구권, 공시체계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발행사가 파산했을 때 이용자 자산을 지키는 장치도 법안에 담길 전망입니다.
④ 한국은행과 금융위, 누가 무엇을 맡을 것인가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송금 수단으로 널리 쓰이면 은행 예금이 빠져나가고 통화정책의 파급 경로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한은은 지급결제 안정과 통화정책 측면에서 발행과 유통 과정에 대한 감독·승인 권한이 필요하다는 입장입니다. 금융당국과의 권한 배분이 조율되어야 합니다.
기본법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법이 통과돼도 곧바로 현장이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22대 국회 전반기 민주당 디지털자산 태스크포스 간사를 맡았던 안도걸 의원은 전자금융거래법, 특정금융정보법, 외국환거래법에 대한 검토를 마치고 개정안 마련에 착수했다고 밝혔습니다. 기본법 시행과 관련 법률 정비 사이에 공백이 생기면 스테이블코인 인프라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국경을 넘나드는 스테이블코인 거래를 외국환 규율체계에 포함하는 방안, 그리고 비트코인 등 디지털자산 현물 ETF 도입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도 함께 추진됩니다.
한눈에 비교
| 구분 | 예금토큰 | 원화 스테이블코인 |
|---|---|---|
| 법적 성격 | 은행 예금 | 가상자산 |
| 발행 주체 | 시중은행 9곳 (한은 CBDC 담보) | 미정 — 최대 쟁점 |
| 법적 근거 | 기존 예금 제도 안에서 실증 | 디지털자산기본법 제정 필요 |
| 현재 단계 | 2단계 실거래 9월 예정 | 정부안 국회 제출 대기 |
| 주도 기관 | 한국은행 | 국회 · 금융위 · 재정경제부 |
| 강점 | 화폐 단일성 유지, 금융안정 | 민간 혁신, 글로벌 확장성 |
| 약점 | 활용처 부족, 낮은 사용 빈도 | 뱅크런 위험, 통화정책 교란 |
| 다음 확장 | 내년 국채 토큰화 실증 | 전금법 · 특금법 · 외환법 후속 |
2026년 7월 공개 자료 기준. 입법 쟁점은 조율 과정에서 바뀔 수 있습니다.
대립인가, 분업인가
여기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두 트랙이 서로를 밀어내는 관계로 그려지곤 하지만, 정작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신현송 총재는 올해 4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CBDC와 그를 토대로 발행되는 상업은행 예금토큰이 디지털 통화 생태계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스테이블코인에 부정적이었던 점을 인정하면서도 입장이 정리됐다고 했지요.
그리고 7월 9일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테이블코인과 예금토큰이 각각 특화된 용도가 있다고 생각하며,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를 조속히 도입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요.
한은이 제시해온 조건은 비교적 일관됩니다. 은행 같은 신뢰 가능한 기관이 발행하고, 엄격한 규제를 지키고, 즉시 상환이 가능하며, 준비자산이 안정적으로 확보된다면 보완적 결제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은이 스테이블코인을 경계하는 진짜 이유는 화폐의 단일성입니다. 발행사마다 신뢰도가 다르면 A사 코인 1만 원과 B사 코인 1만 원이 시장에서 다른 값에 거래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화폐는 화폐이기를 그만둡니다. 예금토큰이 중앙은행과 은행으로 이뤄진 현행 2층 화폐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입히되 신뢰의 뼈대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한국은 왜 미국과 다른 길을 가나
미국은 지난해 제정한 지니어스법(GENIUS Act)으로 스테이블코인 발행과 준비자산 규제를 제도화했습니다. 정부가 직접 디지털 달러를 발행하는 대신, 민간이 발행하는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통해 달러의 국제적 영향력을 넓히는 전략으로 읽힙니다. 실제로 테더의 USDT와 서클의 USDC는 이미 사실상의 디지털 달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반대편에 섰습니다.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통화 신뢰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이 차이의 배경으로 기축통화국과 비기축통화국의 처지가 꼽힙니다. 미국은 민간이 발행한 달러 스테이블코인만으로도 달러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반면 한국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해외로 확산될 경우 외환관리와 통화정책에 미칠 영향까지 함께 계산해야 합니다. 한국은행이 CBDC를 통화 시스템의 안전판으로 붙들고 있는 이유입니다.
다만 시간이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미국 지니어스법의 본격 시행이 내년 1월로 예정돼 있고, 유럽연합은 MiCA를 전면 시행했으며, 대만도 관련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업계에서 속도론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완성도를 따질 단계가 아니라 일단 제도를 만들어 놓고 개정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입법이 늦어질수록 국내 기업이 이 시장에 들어갈 여지가 줄어든다는 우려도 함께 나옵니다.
앞으로 지켜볼 네 가지
① 9월 실거래가 실제로 시작되는가
시스템 개발과 참가자 모집이 관건입니다. 일정이 밀린다면 이유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② 1인당 사용 횟수가 1.4회를 넘어서는가
2단계의 진짜 성적표입니다. 가맹점 확대와 P2P 송금이 이 숫자를 바꿔놓을 수 있을지가 핵심입니다.
③ 정부안이 언제 국회에 제출되는가
그리고 발행 주체 조항이 어떻게 쓰여 있는가. 이 한 조항에 은행권과 빅테크의 판도가 걸려 있습니다.
④ 정치 일정과의 경주
지방선거를 앞둔 국회 일정이 최대 변수로 지목돼 왔습니다. 연내 처리 여부가 여기서 갈립니다.
정리하며
두 트랙은 경쟁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질문에 답하고 있습니다.
예금토큰은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바꿀 것인가에 답합니다. 화폐제도의 뼈대를 그대로 두고 그 위에 기술을 얹습니다. 그래서 안전하지만, 사람들이 굳이 쓸 이유를 만들어내는 데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은 어떻게 하면 빠르게 바꿀 것인가에 답합니다. 민간의 속도와 상상력을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확장성은 크지만, 무엇이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가 아직 없습니다.
한국은 두 답을 모두 쥐려 하고 있습니다. 예금토큰은 이미 굴러가고 있고, 스테이블코인은 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해 하반기가 그 균형이 어디에서 잡히는지 드러나는 시기가 될 것 같습니다.
한국은행 프로젝트 한강 관련 보도 (연합뉴스, 파이낸셜뉴스, 헤럴드경제, 2026년 7월 20일)
재정경제부 「2026년 경제성장전략」 (2026년 7월 14일 관계부처 합동 발표)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 동향 보도 (디지털데일리, 이데일리, 2026년 7월)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 국회 인사청문회 및 재정경제기획위원회 발언 보도 (헤럴드경제, 서울경제, 2026년 4월 · 7월)
한국은행 자산 토큰화 관련 분석 보도 (토큰포스트,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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