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 기준일 : 2026년 10월 3일 · 시리즈 「향신료에서 명품까지」 4편
시리즈 「향신료에서 명품까지 — 무역이 바꾼 부의 지도」
1편 십자군 전쟁, 세계 무역의 문을 넓히다
2편 오스만이 막은 길, 유럽은 바다로 나갔다
3편 포르투갈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졌나
4편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는 누구였나
5편 길드, 장인들이 만든 경제 공동체
6편 장인정신은 어떻게 명품이 되었나
7편 신항로 이후, 누가 부자가 되었나
번외편 시리즈별 추천도서
이 글에서 함께 볼 사실
① 영국 동인도회사는 1600년 12월 31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2년 3월 20일에 세워졌습니다.
② 영국 동인도회사는 초기에 항해 한 번마다 투자금을 모으고 정산했습니다.
③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누구나 주식을 사고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었습니다.
④ 1720년 남해 회사 주가는 몇 달 만에 1,060파운드까지 올랐다가 150파운드로 추락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저는 '정의'부터 묻고 싶습니다
3편에서 영국 동인도회사가 1600년에 세워졌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그보다 1년 남짓 늦은 1602년에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는 영국일까요?
그런데 많은 책과 강의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부릅니다. 같은 사실을 두고 답이 엇갈리는 셈입니다. 저는 이 엇갈림이 날짜가 아니라 무엇을 주식회사라고 부를 것인가라는 정의의 문제에서 생긴다고 봅니다. 이번 글에서는 두 회사의 속을 들여다보며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 — 항해마다 정산하던 회사
1600년 12월 31일, 엘리자베스 1세의 특허장을 받은 영국 동인도회사는 125명의 주주와 7만 2천 파운드의 자본으로 출발했습니다.[1]
하지만 운영 방식은 오늘날의 회사와 달랐습니다. 1601년부터 1612년까지의 초기 항해는 '개별 항해'라고 불리는데, 투자자들이 항해 한 번의 비용을 각자 대고 그 항해의 이익을 모두 나눠 가졌습니다. 그 이익이 100% 아래로 떨어지는 일이 드물 만큼 수익성이 좋았다고 합니다.[1] 1612년 이후에는 여러 항해를 묶어 투자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지만, 이 역시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정산하고 해산하는 구조였습니다.[12]
자본이 회사에 계속 남는 구조가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입니다. 1657년 10월 크롬웰이 새 특허장을 내주면서 비로소 자본이 영구적인 것이 되었습니다.[2] 쉽게 비유하면, 초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여행 갈 때마다 회비를 걷고 다녀오면 정산하는 모임에 가까웠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 처음부터 자본을 묶어 둔 회사
네덜란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1590년대부터 여러 소규모 회사가 경쟁적으로 아시아에 배를 보내자, 1602년 3월 20일 네덜란드 의회는 이들을 하나로 합쳐 21년간 동인도 무역을 독점하는 회사를 세웠습니다.[3]
이 회사는 640만 길더의 자본으로 출발했고, 설립 문서 제10조는 일반 시민도 주식을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4] (640만 길더는 당시 네덜란드 노동자 2만 명이 넘게 1년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수천억 원에 이르는 규모입니다.) 네덜란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주가 될 수 있었고, 그 주식을 다른 사람에게 넘길 권리도 있었습니다.[3] 주식을 사고파는 일이 잦아지자 암스테르담에는 이를 위한 거래소가 생겼습니다.[5] 오늘날로 치면 상장 회사와 증권 시장이 함께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사의 또 다른 얼굴에 눈길이 갑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전쟁을 벌이고, 죄인을 가두고 처형하며, 조약을 맺고, 자체 화폐를 찍고, 식민지를 세울 수 있는 권한까지 가졌습니다.[6] 겉으로는 무역 회사였지만, 실제로는 국가처럼 움직이는 회사였던 셈입니다. 장사라는 간판 뒤에 군대와 조약이 있었다는 점에서, 저는 이 시리즈에서 줄곧 이야기해 온 명분과 실리를 다시 봅니다.
| 구분 | 영국 동인도회사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
|---|---|---|
| 설립 | 1600년 12월 31일 | 1602년 3월 20일 |
| 출발 자본 | 7만 2천 파운드 | 640만 길더 |
| 자본 운영 | 항해·기간별 정산 (1657년부터 영구 자본) | 처음부터 장기 자본 |
| 주식 거래 | 초기에는 제한적 | 시민 누구나 매입·양도, 거래소 형성 |
| 특별 권한 | 동인도 무역 독점 | 무역 독점, 전쟁·조약·화폐 발행 |
※ 출처 [1][2][3][4][5][6]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최초'로 보는 이유
'최초의 주식회사'를 따질 때 설립 날짜보다 주식회사다운 구조를 갖췄느냐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투자한 돈이 회사에 계속 남아 있는가, 주식을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이 있는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처음부터 함께 갖춘 곳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였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먼저 세워진 것은 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아는 주식회사의 모습에 가까워진 것은 1657년의 일입니다. 그래서 "설립은 영국이 먼저, 근대적 주식회사는 네덜란드가 먼저"라고 정리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봅니다.
주식회사의 그림자 — 1720년 남해 회사 거품
주식회사는 큰돈을 모으는 놀라운 발명이었지만, 그만큼 큰 그림자도 드리웠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영국의 남해 회사 거품입니다.
남아메리카 무역권을 내세운 남해 회사의 주가는 1720년 6월 25일 한 주에 1,060파운드까지 치솟았다가, 9월 말에는 150파운드로 곤두박질쳤습니다.[7] 수많은 투자자가 파산했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도 큰돈을 잃은 것으로 전해집니다.[9] 그가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다"고 한탄했다는 말이 유명한데, 이 말은 정확한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일화입니다.
이 무렵 영국 의회는 왕의 특허장 없이 주식회사를 세우지 못하게 하는 이른바 '거품법'을 통과시켰습니다.[7] 겉으로는 투기를 막는다는 명분이었지만, 정작 이 법을 밀어붙인 것은 자기 주식으로 몰릴 돈이 경쟁 회사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싶었던 남해 회사였다는 분석이 있습니다.[11] 이 법은 100년 넘게 이어지다 1825년에야 폐지되었습니다.[8]
이 사건 또한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습니다. 실체보다 기대가 앞서 가격이 치솟고, 규칙을 만드는 쪽이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는 모습은 지금의 자본 시장에서 자주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에 대한 생각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근대적 주식회사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장기 자본, 자유로운 주식 거래, 거래소라는 세 요소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회사가 군대와 조약을 거느린 '작은 국가'였다는 점, 그리고 주식회사가 탄생한 지 120년 만에 거품과 그 거품을 이용한 규칙까지 등장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합니다.
이런 시각도 있습니다. 브리태니커는 1555년 세워진 영국의 모스크바 회사를 두고, 자본을 항해마다 돌려주지 않고 계속 운용한 영국 최초의 주식회사라고 소개합니다.[10] 이 기준을 따르면 장기 자본이라는 특징은 네덜란드보다 반세기 앞서 영국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나요? '최초'는 먼저 세워진 회사로 봐야 할까요, 아니면 지금의 모습을 먼저 갖춘 회사로 봐야 할까요?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 자주 묻는 질문
Q1.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는 어디인가요?
기준에 따라 다릅니다. 설립 연도로는 영국 동인도회사(1600년)가 앞서고, 장기 자본과 자유로운 주식 거래를 갖춘 근대적 주식회사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1602년)가 흔히 꼽힙니다.[1][3]
Q2. 영국 동인도회사도 주식회사였나요?
네, 여러 투자자가 지분만큼 이익을 나누는 주식회사였습니다. 다만 초기에는 항해나 기간별로 정산했고, 1657년부터 자본이 영구적인 형태가 되었습니다.[1][2]
Q3. 거품법은 어떤 법이었나요?
1720년 영국에서 왕의 특허장 없이 주식회사를 세우지 못하게 한 법입니다. 1825년에 폐지되었습니다.[7][8]
다음 편 예고
5편에서는 주식회사보다 훨씬 앞서 유럽 경제를 떠받쳤던 장인들의 조직, 길드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떻게 움직였는지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주식회사,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존 미클스웨이트·에이드리언 울드리지, 『기업의 역사』
동인도회사에서 현대 기업까지 '회사'라는 제도의 역사를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에드워드 챈슬러, 『금융 투기의 역사』
남해 회사 거품을 비롯한 투기의 역사를 다뤄, 오늘날 자산 시장과 비교해 읽기 좋습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1] Encyclopaedia Britannica 1911년판, "East India Company" (Wikisource 공개본)
https://en.wikisource.org/wiki/1911_Encyclop%C3%A6dia_Britannica/East_India_Company
[2] Encyclopedia.com, "English East India Company (EIC)" (접속: 2026-10-03)
https://www.encyclopedia.com/history/encyclopedias-almanacs-transcripts-and-maps/english-east-india-company-eic
[3] Gresham College, "The Dutch East Indies Company - The First 100 Years" (접속: 2026-10-03)
https://www.gresham.ac.uk/watch-now/dutch-east-indies-company-first-100-years
[4] World History Encyclopedia, "Dutch East India Company" (접속: 2026-10-03)
https://www.worldhistory.org/Dutch_East_India_Company/
[5] Wikipedia, "Euronext Amsterdam" (접속: 2026-10-03)
https://en.wikipedia.org/wiki/Euronext_Amsterdam
[6] Wikipedia, "Dutch East India Company" (접속: 2026-10-03)
https://en.wikipedia.org/wiki/Dutch_East_India_Company
[7] Wikipedia, "1720" (접속: 2026-10-03)
https://en.wikipedia.org/wiki/1720
[8] Wikipedia, "Bubble Act" (접속: 2026-10-03)
https://en.wikipedia.org/wiki/Bubble_Act
[9] Historic UK, "The South Sea Bubble of 1720" (접속: 2026-10-03)
https://www.historic-uk.com/HistoryUK/HistoryofEngland/South-Sea-Bubble/
[10] Encyclopaedia Britannica, "Muscovy Company" (접속: 2026-10-03)
https://www.britannica.com/topic/Muscovy-Company
[11] Market Histories, "The South Sea Bubble: When Britain Gambled on a Trading Company" (접속: 2026-10-03)
https://www.markethistories.com/en/the-south-sea-bubble-when-britain-gambled-on-a-trading-company
[12] The British Raj 아카이브(ibiblio), "Appendix 1" — 동인도회사 특허장 연혁 (접속: 2026-10-03)
https://www.ibiblio.org/britishraj/Jackson7/appendix01.html
